2019. 4. 5. 11:21 ◑ Got impressed/By books

 

항상 생각, 심리에 관심이 있어왔고,

특히 눈에 보이는 것들, 즉 외형, 피상적인 것들만 중시하고 판단하는 집단 속에서 지쳐가는 요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고 사유하기 때문에 복잡한 동물이지만 짐승같은 면도 있음을,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임을,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하는 생각들도 결국은 감정의 영향을 받는 것이고 감각이 인지보다 상위에 있다. 감정을 인지하는 순간 이미 현재의 시간은 지나간 것이므로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결국 자기 경험(직접이든 간접이든), 과거를 기반으로 생각하고 판단내리기 때문에 각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재의 그 순간, 내 감정에 충실하고 삶에서 필연적인 후회라는 감정에 매달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이 책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내가 잘 이해했다면.

 

안그래도 순간의 감정에 내 마음이 너무 왔다갔다(?)하는 것 같아 평온함을 갖고 싶은게 몇년 전부터 나의 화두였지만 여전히 흔들리고 있다. 내 생각보다 나는 더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고, 미술을 하기 위해서는 이 섬세함을 유지하고 순간의 감정을 잘 캐치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지만, 스트레스가 따라오기 때문에 힘들어진다는 것이 마치 양날의 검 같다. 다음주부터는 명상 프로그램에도 참여해보려고 하고 이렇게 생각, 심리와 관련된 책들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려보려고 하지만 잘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 책에 따르면 결국 내 생각은 감정에 좌우되는 것이 맞기에 순간에 느껴진 감정을 인식해서 그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생각 연습을 해야할 것 같다. 나의 건강을 위해, 내 주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아래는 인상적이었던 구절을 실어보았다.

 

 

21 결혼식장에서 신부의 베일을 걷는 신랑의 손은 사랑의 두 번째 단계로 들어섰다는 신호다. 서로에게 결혼 이전에 보여준 행동, 마음, 그리고 들려준 약속이 허식이라는 것, 이젠 달라진다는 것, 지금부터 솔직하게 짐승이 된다는 것의 신호다. 이 달라짐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베일 속에서 상대를 보려 하면 사랑에 실패한다. 언제나 베일 뒤에 짐승 말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 결혼생활은 즐겁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예술작품이 된다. 그러므로 첫사랑이든 마지막 사랑이든 사랑의 환상과 아픔이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감춘 베일의 거부하기 어려운 절대적 힘에서 온다. 그 힘은 나를 살아가게 하는 숭고한 목적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증오의 원천이 된다. 사랑은 숭고한 짐승이다. 보이는 것 뒤에 숨은 보이지 않는 것의 절대적인 힘, 아는 것 뒤에 숨은 모르는 것의 힘을 경험하기에 나는 겸손해진다. 사랑은, 생각하지 않는 그곳에서 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미적 형식으로서 생각의 속임수를 잘 드러낸다.


36 하늘이 맑고 푸르면 공연히 기분도 밝아진다. 구름이 잔뜩 끼고 하늘이 잿빛일 때 나는 우울해진다. 비가 오면 빈대떡과 술 생각이 난다. 도대체 잿빛 하늘은 왜 우울한가. 하늘이나 대기가 우울하다고 느낄까. 비가 빈대떡 집이라도 차렸단 말인가. 아무 상관없다. 다만 내 마음이 밝고 우울하거나 술이 당기는 것이다. 울한 것도 내 마음이고 술 생각도 내 느낌이다. 사물 자체는 아무 의미를 띠지 않는다. 다만 사물과 내가 교우하고 그 소통에서 나온 감흥을 대상(사물)에게 덮어씌운 것이다. 나와 사물들은 나도 모르게 서로 통한다. 내 몸이 그들의 몸이고 내 머릿속 기억의 보관소도 그들과 같은 몸으로 이뤄졌기에 소통한다. 이상한 점은, 나는 그 이유를 알려 하지 않고 그저 잿빛 하늘이 우울하고 비가 술을 권하는 양 착각한다는 것이다. 사물은 내 몸 밖의 몸이고 내 몸은 내 몸 아닌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하이데거는 이렇게 표현했다. 생각한다는 것thinking은 사물이 행동하는 것thinging이라고.


50 언어는 몸의 기억과 만물을 정확히 재현하지 못한다. 사물은 언어를 넘어 무한히 변모하고 흐르지만 언어는 내가 유한한 만큼 불완전하다. 그것 역시 내 경험(기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경험의 귀로 듣고 내 경험의 혀로 말한다. 소통에는 언제나 여분이 있다. 말이 숨긴 감각, 그 속임수를 아는 한 나는 오해와 편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말을 하는 순간 의미가 정확히 전달될 거라는 확신을 갖는다. 의식이 집중력이 감각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말은 외롭다. 감각은 언제나 몸으로 꿈을 꾸기 때문이다.


68 제임스는 말한다. 우리는 의식적인 자동인형들이라고We are conscious automata. 우리 선택이나 의지는 거의 다 자동적,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삶이란 매 순간 일어나는 일에 정신을 집중하고 판단을 내리는 가운데 이뤄진다. 그런데 과거의 경험을 저장해놓지 않고 무슨 기준으로 인지하고 판단한단 말인가. 저축통장에 돈이 한 푼도 없는데 어디에서 잠을 자고 무엇으로 먹을 것을 마련하는가와 같은 물음이다. 마음은 기억의 저축이고 생각은 물질이다.


86 타인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속의 또 다른 나를 받아들이는 관용을 의미한다. 

 인간만이 시계를 보고 과거를 회상하며 미래를 꿈꾼다. 그러다보니 현재가 증발한다. 아무리 매 순간을 즐기라고 해도 매 순간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란 오직 ‘일정한 기간duration’으로만 존재한다. 회상 능력은 ‘내 속의 또 다른 나’라는 자의식이고 이 능력은 자동적이어서 지금 일어나는 일을 인식하거나 판단 내리는 데도 간섭한다. 아니, 과거의 경험이 없으면 현재 인지와 판단도 할 수 없다. 제임스는 이를 이정표에 비유했다. 경험하는 곳곳에 표지를 붙여놓아야 우리는 이 표지판에, 이정표에 의지해 길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제 눈에 안경을 쓴 채 사물을 인지하고 판단한다.


103 생각이나 의지 속에는 이처럼 무의식이라는 에너지가 숨어 있다. 우리를 움직이는 동력은 생각이 아니라 그 밑에 억압된 감정, 감각, 정서다.


110 삶이란 신이 내린 오차를 실현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기억이나 생각의 오류가 일어나는 이유는 의식과 저장소라는 이중 구조뿐 아니라 뇌가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기 때문이다. 기억을 인출하는 순간까지 계속 저장되는 경험들은 앞선 경험 위에 무한히 덧씌워진다.

 지휘자의 몸짓에 따라 여러 악기가 하나의 악보를 바탕으로 소리를 내는 것이 오케스트라다. 같은 맥락에서 의식은 지휘자다. 경험들은 커다란 프레임에 맞춰 선택하고 저장하며 인출한다. 어떤 특정한 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이렇게 건지는 것이 회상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주변의 여러 사물, 시간과 공간이라는 상황들, 그리고 감정에 둘러싸여 어우러진 과거다. 현재의 정서와 관계를 벗어나 순수한 과거의 경험을 고스란히 건질 수는 없다. 과거는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한다.


155 경험의 흔적이 많이 쌓이지 않은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절에는 주로 내일을 더 많이 생각하고, 경험의 잔고가 넘치게 쌓인 노년에는 어제를 그리워하며 산다. 내 생각과 판단에서 현재는 빠져 있다. 현재 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할 때도 과거 경험의 눈으로 읽기 때문에 시차에 의해 판단과 인식이 달라진다. 같은 사람도 오래전에 볼 때와 지금 볼 때 다르게 여겨지고 같은 책도 시간이 흐르면 달리 읽힌다. 지금 볼 때 다르게 여겨지고 같은 책도 시간이 흐르면 달리 읽힌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뉴턴식의 직선적인 시간 개념은 실제 경험에서는 곡선이다. 의식의 진화로 인해 현재의 시간은 증발하고 과거와 미래의 두 지점을 오가는 곡선을 만들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160 소설가나 철학자들은 순간을 놓치지 말고 현재를 열심히 살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 실천하기 불가능하다. 가능한 실천이 아니기에 줄곧 충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의식만 있다면, 아니 동물처럼 습관적 기억만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느 한쪽만 있으면 문제 해결이 쉽다. 그러나 경험하는 시간에서 현재란 없다. 현재는 지각하는 순간 이미 지났다. 울기에 슬픈 것과 마찬가지고 뇌에서 감각의 뉴런들에는 이미 불이 반짝 들어왔고 다음 순간 의식이 작동하기에 지금이라고 느낀 순간 이미 그 시간은 지난 것이다.


167 깨달음일지라도 그것에 매달리지 마라. 세상은 덧없고 무상하기에 하나의 지식에 매달리면 많은 경험을 하지 못한다. 두려움 없이 경험하는 것, 모든 대상에서 얻는 것은 순간의 인상일 뿐이며 외형과 인상이 우리가 잡을 수 있는 전부다.


168 생각은 그것이 깨달음일지라도 매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감각은 새로운 생각을 낳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해야 했다는 후회조차 흘려보내야 할 어제의 일인 것이다. 삶은 늘 후회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후회에 매달리지 않는 것이 지혜다. 오늘의 후회는 내일의 축복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후회에 강박적으로 매달리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후회스러운 일이 의외로 이후 축복이 됐음을 알게 된다.


170 어떤 길을 택하든 후회는 따른다. 가지 않은 길은 현실의 불만을 메꾸는 수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회에 매달리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판단과 생각은 물처럼 끝없이 흐르고 변화한다. 후회는 삶의 본질이다. 우리는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과 사유의 흐름 속에 발을 딛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어떤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미래의 어느 순간에 불쑥 나타난다. 그것이 시간이다.


193 시간 역시 강물처럼 흐른다. 젊은 시절에는 몸이 빠르기에 강물의 흐름보다 더 앞서나간다. 시간이 몸보다 느리며, 그래서 시간이 길다고 느낀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몸이 느려지면서 강물의 흐름을 따르지 못한다. 그러니 시간이 나를 두고 저만큼 빨리 달아난다고 느낀다. 조금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 반대로 남은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에 의식은 조급해진다. 감지하는 시간이란 이처럼 상대적이고 마술적이다.

 시간은 경험의 방식이다. 후회는 반복되고 미래는 예상하지만 결코 그대로 실현되지 않는다. 회상과 예상은 현재라는 텅 빈 공간을 채운 꿈이며 희망일 뿐이다. 착각은 필연적인 요구다. 그러므로 후회가 삶의 본질임을 모르면 후회에 매달려 삶의 시간을 놓쳐버리게 된다.


225 그렇다면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 감정은 무엇일까. 두려움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기에 느끼는 두려움은 언제 포식자에게 먹힐지 모른다는 원시적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공포는 살아남기 위한 동물적 본능이다.


231 개인마다 기억이 다른 만큼 생각도 다르다. 또한 환경과 나이에 따라 경험도 다르다. 문제는, 나는 내 생각으로 세상을 보고 타인을 본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살 수 없고 이것이 내가 실수를 하면서 살아가는 이유다. 경험의 차이를 잊고 내 위치에서 대상을 판단하며 결정할 수밖에 없는 한계다. 그래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부모나 스승, 친구로부터 조언을 구한다. 이것은 실수를 줄이기 위해 필요하다. 반면 애착이 강할수록 자기 눈으로 아이를 보고 자기 소망과 생각을 불어넣는다. 원래 한 몸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고 착각하면서 자기 경험에서 나온 충고를 들려준다. 물론 자식은 이를 잘 이해할 수 없다. 경험이 다르고 아직 겪어본 적이 없어 의식으로는 옳은 것 같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246 프로이트는 우울증의 원인인 자기 비난이 대개 다른 사람보다 더 정직하고 양심적인 사람에게 잘 일어난다고 말한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을 나무라지 말고 긍정하며 하던 일을 꾸준히 해 좋은 결과로 앞의 나쁜 경험을 덧씌우는 것이 좋다. 결국 자신감의 상실에서 나타나는 증상이기 때문에 더 좋은 일로 나쁜 기억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한번 경험한 것은 몸에 새겨지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지만 충격이나 분노와 수치심의 강도는 낮아지고 점차 떠오르는 빈도수가 줄어들기 마련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치유법이다. …… 우리 마음은 물처럼 흐르고 뇌는 감정과 의식이라는 이중 장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계절이 바뀌듯이 자연스럽게 다른 경험들을 쌓는 것이 좋다. 제임스가 말했듯이 자연스러운 망각은 신의 축복이다.

 겨울과 여름이 교차하면서 음양의 조화로 자연이 순환하듯이 인연과 악연은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한다. 상처에 집착하고 매달리지 않는 한, 상처가 있으면 반드시 치유도 있기 마련이다.


248 그는 우리가 인연을 잘 만들고 업을 잘 쌓으면 된다고 말한다. ‘자업자득’이라는 말처럼 업이란 좋은 경험을 쌓는 일이다. 깨달음은 지혜이고 깨달음을 얻으면 삶과 죽음의 차이가 없어진다. 진정한 나는 없다. 나무가 나무 아닌 것으로 만들어지듯이 나는 ‘나 아닌 것’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물질이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내 몸이 몸 밖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 작은 몸이 큰 몸과 하나 되는 고향 가는 길이다.

 “여름에는 여름옷을 입고 겨울에는 겨울옷을 입지요.” 답은 그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우리는 이리 저리 깊이 생각하며 미혹에 빠진다. 하이데거는 테크놀로지의 지나친 발달을 우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멀리 가는 기술의 발달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감각을 되살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을 볼 줄 아는 지혜란 무엇인가. 바로 내 마음(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대자연의 은총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 길이다.


277 공감은 무의식 차원에서 네가 느끼는 것을 나도 느끼고 의식 차원에서 내 판단이 개입되는 두 단계의 합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경험에 따라, 시간과 공간에 따라 공감의 정도가 달라진다. 반면 동정은 교육의 힘에 의해 타인의 고통에 가엾음과 연민pity을 느끼는 것이다. 주로 의식 차원에서 이뤄지고 시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공감은 소설의 주인공과 자발적을 동일시하고 난 후 시간이 흐르면 거리를 두고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동정은 도덕적 감정으로서 범위가 좁다. 가장 큰 차이는, 공감은 원초적으로 자아와 타인의 합일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내가 타인의 입장이 되는 것이므로 자아를 대상에 투사한다. 그런 뒤 타인과 거리를 두고 그를 인정하며 이해한다. 같으면서 다른 것이다. ‘나’라는 개인이 사회적 동물이 되는 이중 장치다. 그러나 동정은 대상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불쌍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를 타인에 투사하지 않는다. 


342 의식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서 뒤로 간다. 아니 뒤로 가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현재를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오직 하나의 기간으로서 현재가 존재할 뿐이며 이것을 소중히 다뤄야 한다. 그냥 부딪히는 현실을 무조건 성실히 최선을 다해 사는 길 외엔 없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비전은 그저 현실을 견디는 수단일 뿐 모두 참모습이 아니다. 삶은 ‘영원한 현재’다. …… 심리는 몸 그 자체다. 객관적인 지식이 아니라 그동안 몸에 쌓인 경험의 정보가 몸에 즉시 반응하는 것이다.

posted by 드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