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 11. 12:02 ◑ Got impressed/By books


12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디자인이나 단순한 기술 하나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삶들의 바탕색을 회색에서 파랑으로 바꾸었다.

 ‘누군가의 고통에 눈길을 포개는 이들의 섬세한 뜨거움’


49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인이 있어야 사람은 그 다음 발길을 어디로 옮길지 생각할 수 있다. 자기에 대해 안심해야 그 다음에 대해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


51 네가 옳다’는 타인의 확인이 필요한 건 이렇게 자기 자신도 전적으로 자기 편이 돼주기 힘들기 때문이다.


57 내 가치관이나 신념, 견해라는 것은 알고 보면 내 부모의 가치관이나 책에서 본 신념, 내 스승의 견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감정은 오로지 ‘나’다.


68 고급 정장에 계급장이나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있을 때 나를 주목하고 인정해 준 사람보다 내가 맨몸이었을 때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극진히 보살펴 준 사람은 뼛속에 각인된다. 내 존재 자체에 반응한 사람이니 그 사람만이 내 삶에 의미있는 사람이 된다.

 그런 사람을 만나야만 사람은 존재의 근원적인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존재의 근원적 불안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래야 살아갈 힘의 최소한의 안정 기반을 만들 수 있다.


80 사람들은 누가 죽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그 마음에 대해 자세히 묻는 것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라 여긴다. 아니다. 정반대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가장 절박하게 원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심각한 내 고통을 드러냈을 때 바로 그 마음과 바로 그 상황에 깊이 주목하고 물어봐 준다면 위로와 치유는 이미 시작된다. 무엇을 묻느냐가 아니고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치유이기 때문이다.


105 그런 감정들을 떠올리고 얘기할 수 있다면 그것이 존재 자체에 대한 얘기다. 내 상처의 내용보다 내 상처에 대한 내 태도와 느낌이 내 존재의 이야기다. 내 상처가 ‘나’가 아니라 내 상처에 대한 나의 느낌과 태도가 더 ’나’라는 말이다.


109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127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 으레 던지는 “힘들었겠다”는 말은 사람 마음에 의미 있게 가닿지 않는다. 공감적인 단어이지만 공감받았다는 느낌을 상대에게 주지 못하는 건 그 말이 잘 모르고 던지는 말이라서다. 자세히 모르는 사람이 던진 말이 의미 있는 정서적 파장을 만들지는 못한다.


141 공감은 그저 좋아 보이는 외형에 대한 지지와 격려의 반응이 본질이 아니다. 존재 자체에 대한 주목이어야 하고 그럴 때만이 그 위력이 오롯이 나타난다.


168 감정은 항상 옳지만 그에 따른 행동이나 판단까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감정은 언제나 공감할 수 있지만 그의 행동이나 판단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217 우리는 은연중에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이 따로 있다고 여긴다. 좋은 감정은 수용하지만 나쁜 감정이라 믿는 것은 없애거나 억누르려 한다. 후회나 짜증, 무기력, 불안, 두려움 같은 것은 나쁜 감정, 없애야 하는 감정이고 유쾌하고 잘 웃는 마음, 매사 긍정적이고 좌절하지 않는 마음은 좋은 감정이다. 북돋우고 강화시켜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나쁜 감정을 어떻게 해서라도 좋은 감정으로 전환시킬 수 있어야 멘탈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는 건 좋은 일인가. 좋을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얼마든지 있다. 때론 위험하기도 하다. 긍정적 감정은 자기 합리화와 기만이 만들어내는 결과일 때도 있고 자기 성찰의 부재를 뜻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성찰이 깊고 스스로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면 불안하고 흔들리게 된다. 상황을 더 깊고 입체적으로 보는 과정에서 만나는 불안은 불가피한 것이다. 깊은 성찰은 여러 갈래의 길과 전망을 보여준다. 복잡한 갈래 길들을 바라보며 인정하고 통합하는 과정은 불안을 전제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심리적 토대는 더 튼실해진다. 이럴 때의 불안은 건강한 불안, 건강한 혼란이다. 입체적 통합을 위한 필수 과정이다. 건강한 불안을 외면하면 이 모든 과정이 생략되고 사라진다. 좋은 감정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듯 부정적인 감정도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상황마다 다르다. 고정값이 아니므로 개별적 상황마다 다시 성찰해야 알 수 있다.


219 감정은 판단과 평가,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내 존재의 상태에 대한 자연스런 신호다. 좋은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내 감정은 항상 옳다.


226 사랑하는 사람들일수록 공감에 실패할 확률이 더 높아진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사람은 더 많이 오해하고 실망하고 그렇게 서로를 상처투성이로 만든다. 서로에 대한 정서적 욕구, 욕망이 더 많아서 그렇다.

 옆집 사는 이웃에게는 친절하고 배려심 있게 대해도 내 배우자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 어렵다. 남에게는 특별한 기대나 개인적 욕망이 덜해서다. 그러나 내 배우자나 가족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로부터 받고 싶은 나의 개별적 욕구와 욕망이 있다. 그 욕구만큼이나 좌절과 결핍이 쌓인다. 그래서 배우자나 가족에겐 너그럽기가 더 어렵다.


227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건 이런 욕구와 욕망이 채워지지 않고서는 삶이 1밀리미터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아서다. 서로의 사랑에 대한 욕구를 지겨워하지 않고 비난하지도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 채 기꺼이 공급하며 공급받는 일은, 우리 모두가 자기 삶의 동력을 마련하는 일이다. 미룰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다. 휘발유나 전기의 도움 없이 굴러가는 차는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232 계속 바꾼다는 건 흔히 생각하듯 게으르거나 끈기가 없어서만은 아니다. 자기를 찾기 위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고민 속에는 ‘왜 나는 한 가지 일을 진득하게 오래 하지 못하는 걸까?’라는 생각도 늘 함께 들어 있다. 사람은 그런 존재다. 당사자는 그런 자신에 대해 남보다 더 많이 자책하며 생각한다. 그러니 “나중에 후회하거나 힘들다고 하지는 마라” 은 강요는 아이의 퇴로를 막고 철창에 가두는 것과 마찬가지다.


238 아무리 훌륭한 말이어도 일방적인 계몽과 교훈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아무리 옳은 말이어도 듣는 이에게 강박 관념으로 남거나 상처만 주고 튕겨 나가는 경우가 더 많다. 그저 겉보기에 좋은 말일 뿐이다.


267 공감은 내 생각, 내 마음도 있지만 상대의 생각과 마음도 있다는 전제 하에 시작한다. 상대방이 깊숙이 있는 자기 마음을 꺼내기 전엔 그의 생각과 마음을 나는 알 수 없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관계의 시작이고 공감의 바탕이다.


282 상처를 떠올리고 말해서 힘든 게 아니라 내 상처가 거부당하는 느낌,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아픈 것이다. 상처를 말하는 일이 더 큰 고통과 상처로 이어졌던 경험 때문에 힘든 것인데, 그걸 상처를 얘기하는 것이 당사자를 더 아프게 하는 것이라고 오판한다. 반복하자면 아팠던 얘기를 다시 꺼내는 게 고통스러운 것은 그 얘기가 외면당하고 공감받지 못해서다. 거기에 더해 내 고통이 충조평판의 대상으로 전락할 때다.


291 누군가의 마음은 타인이 옳다 그르다 판단할 영역이 아니다. 마음과 느낌은 충조평판의 대상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존중받아야 할 존재의 고갱이다.


294 공감이란 나와 너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지만, 계몽은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언어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들이다. 그래서 계몽과 훈계의 본질은 폭력이다. 마음의 영역에선 그렇다.


295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을 땐 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충조평판의 다른 말은 ‘바른말’이다. 바른말은 의외로 폭력적이다. 나는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쓰러진 사람을 과장해서 한 만 배쯤은 더 많이 봤다. 사실이다.


301 고통을 손가락 지시로 덜어낼 수는 없다. 체중을 실어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는 일은 ‘심리적 참전’이라 할 만큼 에너지 소모가 필요하다. 당연하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덜어내는 일이므로.




IQ(Intelligence Quotient)에서 EQ(Emotional Quotient aka Emotional Intelligence)로, 단순히 지능지수가 높은 사람이 아닌 감성지수/공감지수가 높은 사람에 주목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AI의 기술이 점점 더 발전하면 할수록,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 가진 고유의 능력이 더 요구되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공감이란 무엇일까?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공감은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이다.(Naver 사전한가지공느낄감, 즉, 타인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 공감에 대한 통념일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을 잘 이해하고 타인의 감정을 내 감정처럼 느끼는 일이 잦다면 공감을 잘하는 사람, 공감능력이 높은 사람이라고 보면 될까. 물론 전혀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들보다 공감능력이 높은 것은 맞겠지만 공감이라는 것이 이렇게 단순히 지수로 측정될 수 있는 능력인가에 대한 의문은 든다. 공감지수라기보다는 이성보다는 감성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더 큰가 아닌가 하는 경향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책을 읽은 후라 이런 생각이 든 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통해 확실히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공감'이라는 개념을 확장시키고 깊게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공감'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더 조심스러워졌고, 나도 나름 공감을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감정이입은 잘 하는 것 같은데 어떤 말이나 반응을 해줘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는 편이라.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아서 건네는 말이 듣는 상대방의 마음에 가닿지 않으면 메아리처럼 허공에서 울릴 뿐이라는 것, 나름 머리를 짜내서 한 말이지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것. 최근에 나도 누군가로부터 이러한 이유로 상처를 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앞으로는 주변 사람들과 대화할 때 함부로 충조평판 하지 않도록 명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감정은 날씨와 같다는 말,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내가 느끼는 감정이 곧 '나'이고 '옳다'는 말, 그 밖에도 현재 또는 과거의 내 상황과 비슷한 사례들을 읽으며 내 마음이 어루만져지는 느낌을 받았다. 버스 안에서 읽다가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비록 가족과 친구 중에 진정한 공감자가 없는 것 같다고 느끼지만, 내 상황 자체를 이해하고 들어주는 '두 사람'이 있어서 버텨나갈 수 있는 요즘. 공감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두 사람의 존재 자체가 큰 힘이 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현재는 심리적인 안정에 도움을 받고 있지만 훗날 이렇게 정기적으로 만날 수 없게 되고 자립해야 하는 날이 온다면 잘 버틸 수 있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괜한 걱정이고 서로에게 공감하며 서로의 존재 자체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아직까지는 가져본다.


최고의 공감 및 지지의 표현 : "당신은(의 마음은) 옳다. (무조건)"


posted by 드쏭